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재현의 문제를 부각시켰다. 즉,서양이 동양에게 그들의 구미에 맞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결국 동양은 서양에 의해 ‘불리우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서양이 ‘그들만의 상상의 동양’을 재현하고 그 ‘재현된 동양’을 실제보다 더 실제로 인식하게 만들었으며 이를 통해 식민 정책을 펼칠 수 있었고 지금도 그러한 식민주의는 진행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이드의 식민주의 담론에서는 지역과 지역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불균형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또 다시 그가 문제 삼고 있는 재현의 방법을 사용해서 또 하나의 ‘서양’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모순이 느껴진다. 이 때문에 『옥시덴탈리즘』같은 책은 되풀이되는 재현의 굴레 속에서 동양 대 서양이라는 대립 구조가 굳어지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강자와 약자,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설정하고 대립시키는 담론들 속에서 때로 사람들이 일종의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싸우고 이기고 싸우고 지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진짜 게임판을 유지시키는 장치는 절대로 건드리지 않고 승자와 패자의 자리만 교환하는 것이다. 게임이 악하다면 이 게임을 진행시키는 장치를 멈춰야 한다. 아니, 어쩌면 이 게임이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만 깨달아도 게임이 끝날지 모른다. 그 장치라는 것이 다름아닌 실재와의 혼동이었을 수 있으니까.
숨은 권력 찾기 – ‘재현’이 만드는 가공 현실
송 태 미
백남준은 역사상 가장 오래 된 텔레비전은 달이라고 말했다. ‘달’은 인류 역사에서 실제와 가상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가장 오래 된 ‘실제적 가상’이다. 상상력의 산물로서 재현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초승달’, ‘반달’ 등은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거의 실제처럼 기능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달들은 ‘실제적 가상’의 한 예일 뿐이다. 사람은 그 본질상 실제 공간뿐 아니라 가상 공간도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기에, 끝이 없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가상을 실제에 가져와 끊임없이 혼합을 시도한다. 위험한 것은, 가상이 한번 실제와 혼합되어 돌연변이를 낳게 되면 그 돌연변이가 어떤 괴물로 자랄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마약과 같은 권력을 가진 ‘실제적 가상’들은 ‘지금’, ‘여기’에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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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봄, 나는 파리 근교의 한 아파트에서 3개월 가량 모르는 사람과 같이 생활한 적이 있었다. 두 개의 방을 각각 하나씩 임대한 것이다. 20대 중반의 내 룸메이트 (각자의 방이 있었지만 편의상 룸메이트라고 했다.) J는 정체 불명의 문제가 있었다(적어도 내 기준에는). J는 소셜 네트워크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삶이 소셜 네트워크에서 이루어졌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보통 오타쿠, 게임 중독자, 우울증 환자의 모습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J는 보통 사람보다 더 사회적이었고 대화에 능통했다. 만약 당신이 J와 대화를 나눈다면 지극히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며 사리 분별을 하는 밝은 아가씨라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다만 J의 신체는 소셜 네트워크에 끌고 들어갈 수 없기에 갖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방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아 운동 결여로 인해, 또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음식만 섭취한 끝에 끔찍한 위장병에 시달렸다.) 문제는 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나와 대화할 때조차도 마치 소셜 네트워크 상에서 만난 사람에게처럼 대화를 한다는 데 있다. 가령, 내가 없는 동안 내가 사다 놓은 우유를 반 통 마시고 저녁에 내가 돌아와 우유를 꺼내면서 ‘우유 좀 마실래?’라고 물으면 ‘나는 유제품을 못 먹어, 체질적으로 소화를 잘 못해서…’라고 대답한다. 도벽을 의심할 정도로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내가 없는 사이 내 방의 모든 물건을 사용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정신분열증을 의심할 정도로 나와 친밀한 대화를 나눴다. 소셜 네트워크 밖의 규범들이 J에게는 무의미했던 것이다. 화성인이 지구인의 규범을 고려하지 않을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어느 날 재미있는 사건이 생겼다. J가 소셜 네트워크 속의 친구와 대화하던 중 그 친구가 나와 아는 사이였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나에 관해 온라인 대화를 나눈 후 내게 달려왔다. 나라는 존재의 흔적을 자신이 인식하는 현실에서 드디어 찾았다는 듯, 반가운 나머지 내게 얘기하는 J의 목소리와 표정에 생기가 넘쳤다. 그 아파트 안에서 내가 J와 단둘이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한 J가 인식하는 현실과 내가 인식하는 현실은 무엇이 유효성을 갖는지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갈등할 수 밖에 없다. 외부 사회에 노출된다면 지금 시점에서는 J의 증상을 정신병으로 규정하겠지만, 30년, 50년 후 어느 날 사람들이 내 상태를 정신병으로 규정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인류의 시초인 아담은 창조 이후 얼마 동안 신과의 교류 시대를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신과의 교류가 단절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때 아담이 신을 피해 숨은 곳은 숲이다. 숲이라는 상징적인 공간 - 종이를 만들 수 있고 책을 만들 수 있는 - 에서 아담은 신과의 교류가 단절된 채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 이 왕국에서 사람이 주체가 되는 문화를 만들고 번성시켰다. 이 인본주의의 시대는 사람과 사람의 교류가 만개한 시대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이 인본주의 시대의 끝자락이다. 우리는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살고 있다. 다음 시대란 바로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분리되는, 즉 사람과 사람 간의 교류가 단절되는 시대다. 신으로부터 달아난 아담이 숨은 곳이 숲이라면, 사람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 아담이 숨을 곳은 모니터 화면인 듯하다. 각종 모니터 화면 속에 사람으로부터 마저 분리된 외로운 아담이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는 이 과정이 아무런 고통 없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환각제 역할을 한다. 더 많은 사람과 더 가까이 있는 듯한 환영 속에서 우리는 엄청난 단절을 경험한다.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는 언어와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세계다. 이 곳에서 많은 시간을 살거나 혹은 이 곳에서만 사는 사람은 언어, 이미지를 거치지 않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언어와 실재 간의 논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반면 언어 내적 논리에는 더 민감해진다. 아직까지는 우리가 언어와 실재 사이의 논리가 필요한 사회에 살고 있지만 언어 내적 논리만이 유효한 사회가 언제 도래할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J를 통해 내가 엿본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 도래할 미래 사회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각종 기술 매체와 결탁한 언어와 이미지가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현상은 이미 오랜 역사를 두고 진행되어 온 일이며 그 기술은 끊임없이 진보한다. 그러나 가장 최근까지도 이들이 파고 들기 힘들었던 영역이 있다면 그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제망, 즉 소셜 네트워크였다. 그런데 인터넷이라는 신기술매체와 결탁한 언어와 이미지는 마침내 새로운 영역을 정복하는 물꼬를 텄다. 이들의 전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관계의 매개자로서 입지를 마련한 후 양쪽을 자신에게 종속시키고 최종적으로는 그들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기.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는 지금 매개로서의 입지를 마련하고 있는 초기 단계에 있고 그래서인지 마냥 친절하다.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등의 대중 매체를 타고 쏟아지는 뉴스들은 언어와 이미지가 만드는 화려한 쇼를 뽐낸다. 우리는 뉴스가 재현해내는 세상을 보면서 분노하고 감동한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뉴스는 어떠한 사실성과도 무관한,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1]의 가장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최근에 나는 매스 미디어 공간에 난무하는 언어와 이미지의 가상성을 재미있는 방식으로 보여 준 한 이미지를 만났다.
『뉴스왕』(→p.4)은 ‘유희왕’이라는 어린이 장난감 카드놀이를 패러디하여 만들어진 이미지 작품이다. 본래 ‘유희왕’ 카드 놀이는 각 낱장의 카드에 가상의 캐릭터가 있고 그 능력에 따라 다른 카드의 캐릭터와 겨룰 수 있도록 만들어진 힘겨루기 놀이이다. 다시 말해, 아이들이 가상의 캐릭터들을 활용해 힘겨루기 게임을 즐기는 도구이다. 이를 패러디한『뉴스왕』은 발상을 뒤집었다. 뉴스들은 뉴스왕이 되기 위해서 실제 대상을 활용해 게임을 즐긴다. 카드의 공격력 및 방어력 등의 말이 가리키는 능력의 주체는 카드들이다.
『뉴스왕』은 대중 매체가 보도한 뉴스를 하나의 가상 캐릭터처럼 설정하여 뉴스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분석한다. 얼마 전 노르웨이에서 있었던 테러 사건을 다룬 뉴스를 하나의 유닛으로 만들었다:
<노르웨이 테러 사건>
“이 카드는 특정 장소의 실제 위험성과 공포 이미지를 무한 복제하여 불특정 장소의 가상 위험성과 공포의 수치를 극대화시키며 이를 통해 현실 감각을 교란한다.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심을 불러 일으켜 현실 공간에 대한 소극적 참여를 유도하는 유닛으로서 현실을 무기력화시킨다/ 사건의 정황을 쉽고 빠르게 이해하기 위해 또 다른 가상 정보망에 빠져들게 하는 2차 공격력이 상당하다/ 해당 국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수록 공격력은 높아지는데, 특수사회맥락적 범죄행위를 보다 궁극적인 대형 이슈(인종 차별, 종교 분쟁...)로 전이시켜 현실을 교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포라는 궁극적 감정과 교감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현실 감각으로부터 역공격을 받을 수 있다”
2010년 여름,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등의 각종 매체에 강용석 국회의원의 여성 비하 발언 사건이 대서 특필된 적이 있다. 그리고 이어서 소속당으로부터 제명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여성 비하 발언 의원 제명>
“이 카드는 보다 중요한 이미지 구축을 위해 부분적 이미지를 제거하여 가상 정보망과 정치 이미지의 혼성적 존재를 자체정화 및 보호하는 유닛이다/ 특정 대상에 국한된 불신과 불만의 감정이 불특정 대상으로 확장되는 2차 파급 효과가 막강하다. 자칫 감정적 적대감이 현실 공간 및 대상을 넘어 가상 영역에 역류해 들어올 수 있으므로 지속적인 정보 수집과 첩보가 중요하다”
『뉴스왕』은 가상의 주체가 실제 사건들을 가지고 놀이를 즐기는 게임을 소개한다. 이는 현실을 재현한 언어와 이미지가 얼마나 현실과 거리가 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현실에 뒤섞여버린 이미지를 이미지 본래의 자리, 가상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우리는 어떻게 언어, 이미지에게 이토록 막강한 권력을 허락하게 되었을까. 어떤 이유로 이들로부터 우리의 주권을 되찾지 못하는 걸까.
« ...이 방 안에는 한 책상 형태의 재봉틀이 놓여 있고(...) 의복 재단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이 재봉틀 책상을 우리는 ‘jeannettes’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기계에 대한 명칭은 아주 최근에서야 붙여진 것으로, 내 딸에게는 익숙한 용어지만, 그 전까지는 오랜 세월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다) 별 다른 명칭 없이 존재했었다. 1922년에 와서야 비로소 『라루스 위니베르셀(Larousse universel)』백과 사전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으며 그 이후로 곳곳에서 그 명칭이 상용되기 시작했고 각종 출판물에도 나타났다. 제조 번호만 붙여졌었던 이 재봉틀 책상에 공식적인 이름이 생기면서 기계 제조업자들과 판매업자들은 카탈로그에 상품명을 적을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상품의 유통이 더 용이해졌다. (...) 1922년 이후부터 재봉틀의 효율성은 전과 같지만 정식 명칭이 등록된 사실만으로 그 위상이 높아졌고 지칭이 간편해짐으로 유통이 용이해졌다. 제조 정보와 명칭은 상품 명세서의 가로 세로 상의 기표이다. 상점에서나 우리의 머리 속에서 모든 사물은 적어도 하나의 이름이 붙여진 순간에서야 비로소 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 (프레데릭 폴(Frédéric Paul), “정흥섭의 작품 세계에 나타난 축적에 대한 연구” 중)
인간은 관계맺기를 위해 창조된 존재다.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미 모태라는 공간에서 최상의 긴밀한 관계로부터 출생이 이루어진다. 출생 이후 줄곧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의 끊임 없는 관계맺기가 이루어진다. 이 관계맺기의 운명 속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이해하려고 들면 너무나 복잡해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언어로, 이미지로 ‘재현하기’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그 무수한 사물들이 각기 이름을 갖고 있는 이유다. ‘재현하기’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인 인간이 이 세상에 던져졌을 때 자기 자신을, 타인을,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재현이다. 그리고 재현의 산물을 통해 현실을 인식한다. 내가 모르는 타자를 알기 위해서 재현을 하고 그 재현된 이미지를 통해 타자를 알았다고 믿고 또 그 믿음대로 보고 행동한다. 짝사랑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름이 재현해내는 대상과 멀어지거나 혹은 관계가 단절된다. 이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시대상과는 별개로 살아 움직이며 우리 삶 속에서 활동한다. 그리고 그 활동 영역은 엄청나다. 사람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 즉 실재만을 계속해서 의식하기 때문에 이름들은 들키지 않고 우리의 삶에 개입할 수 있다. 게다가 오늘날에는 그 이름들이 실제 세계보다 훨씬 비대해져서 많은 문제들을 발생시키고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그 문제의 원인을 이름에게 묻지 않기 때문에 이름은 자유롭게 숨어 다니며 그의 권력을 행사한다. 재현의 그늘에서 권력을 획득하는 매체들, 즉 언어와 이미지는 우리에게 현실의 미니어처를 선사하고 우리는 그 곳에 살기를 선택한다. 그 곳에서 무한한 욕망을 가상 실현하는 대가로 재현 이전의 실재를 감각하는 감각 능력을 상납한다.
나는 재현 매체가 보이지 않는 권력의 주체라고 말했다. 이는 마치 언어, 이미지가 사람을 속이고 실재의 세계에 개입하려는 욕망을 가진 주체라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재현 매체는 그러한 욕망도 없고 그런 계획을 꾸미지 않으며 오히려 실재 세계와 섞이지 않기를 원한다. 언어는 언어의 자리에, 숫자는 숫자의 자리에, 이미지는 이미지의 자리에, 즉 실재의 세계가 아닌 기호의 세계, 가상의 세계에 머물기를 원한다. 언어가, 숫자가, 이미지가 당신을 알아본 적이 있는가? 이들을 실재에 끌고 와서 실재와 섞어버리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의 욕망이 이들을 붙잡고 실재와 섞어서 가공 현실을 만든다. 다시 말해, 재현 매체들은 그 본질상 사람과 일대일 관계 맺기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재현으로서의 역할만 할 뿐 실재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재현된 것을 실제 세계에 끌고 와서 억지스러운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사랑하는가. 아니,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미련이 없다.
편의상 ‘일대일 관계 맺기’를 ‘사적 관계’라고 부르겠다. 언어, 이미지는 사적 관계에서든 공적 관계에서든 매체로서 기능을 한다. 그러나 사적 관계에서는 언어, 이미지가 권력을 획득하지 못한다. 사적 관계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모든 종류의 감각 기관을 활용하여 관계를 맺기 때문에 언어, 이미지에 대한 의존도가 미약하다. 게다가 언어, 이미지가 시시각각 쇄신되기 때문에 그 지배력이 커질 수 없다. 그러나 공적 관계(일대일 관계가 아닌 모든 관계. 대표적으로는 불특정 다수 대중과의 관계가 있다.)에서는 어떤가. 언어, 이미지에 대한 의존도가 거의 백에 가깝다. 우리 사회는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사적 관계 영역이 축소되고 공적 관계 영역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즉, 우리가 인식하는 사적 관계의 중요성은 축소되고 공적 관계의 중요성은 확대되어 왔다. 이런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만약 변화의 방향이 반대였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사적 관계의 핵심인 가정에서 확실한 자리를 잡는 것이 다른 사회 집단, 공적 관계에 기초한 집단에 자리를 잡는 것보다 치열한 관심거리가 되었을까? 가정 주부의 자리가 너무 큰 중요성을 갖는 나머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에 대항해 남성들은 마스큘리니스트가 되어 ‘우리에게도 가정으로 들어가 풀타임으로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라는 슬로건을 외쳤을지도...
나는 이 글에 장 보드리야르라는 사람이 쓴 글을 인용하였고 정흥섭이라는 사람이 만든 이미지를 빌려 왔다. 한 사람은 나와 아무런 사적 관계가 없는, 오직 백프로 언어에 의존되어 공적 관계를 맺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나와 십 년을 함께 살아온 내 남편이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보드리야르라는 성의 가운데 철자를 틀리게 쓴 부분을 큰 실수로 지적하면서 동시에 이미지 주소 앞에 꼭 남편 이름을 써야겠냐고, 빼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덧붙였다. 나는 그때 확대된 공적 관계의 중요성과 축소된 사적 관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나는 보드리야르를 모른다. 그가 썼다고 표기된 책을 읽었을 뿐이다. 만약 보드리야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썼는데 실수로 그 이름이 알려졌다 하더라도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없다. 말 그대로 대중적, 익명적 만남이다. 그러나 내 남편과 그가 만든 이미지는 각각 나와, 언어로도 이미지로도 전달할 수 없는 긴밀한 사적 관계 속에 있다. 그런데 사회 일반적 인식은 내게 보드리야르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그의 글을 인용할 때 이름의 정확한 철자를 함께 기재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반면, 남편이 제작한 이미지의 출처를 적을 때는 작자의 이름이 없어도 된다.
에드워드 사이드를 비롯한 몇몇 포스트식민주의 담론가들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 의해 실재와 다르게 재현된 사실과 재현을 통해 만들어진 왜곡된 정체성의 문제를 보여주었을 때 그가 의존한 방법도 대중적 언어였다. 민족과 민족이라는 공적 관계에서 언어와 이미지가 가진 힘, 그것을 다시 같은 성격의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고 고발하는 것으로는 어떤 대안을 바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는 언어와 이미지의 권력을 강화시키는데 기여한다. 왜냐하면 이는 가상을 실재와 섞어버리는 행위에 장단을 맞춰주는 격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이미지가 순환하는 굴레에서는 사실, 진실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한데도 불구하고 사실, 진실이 논란이 되면 될수록 언어, 이미지의 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하는 데 윤활유를 제공한다.
일기예보가 없었던 시대에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일기 변화를 감지했다. 그리고 일기예보가 일상화되면서 우리는 더 이상 일기 변화를 느끼는 감각을 사용하지 않는다. 감각 자체가 사라졌다. 언어와 이미지가 만드는 가공 현실 속에서 사람은 더 이상 실재와 재현을 구분할 수 없고 구분할 수 있는 감각 자체를 잃어버리고 있다. 활용하지 않는 감각은 늘 퇴보하다가 사라진다. 사적 관계 영역이 축소될수록 이 영역에서 우리가 활용하는 모든 감각들이 퇴보한다. 언제부터인가 시대를 고민하는 예술가들이 이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낭시(Jean-Luc Nancy)[2] 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이미지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 실재를 재현하는 전통적인 이미지가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이미지 자체를 사유하게 하는 이미지이다. 이 두 번째 이미지는 이미지를 통해 실재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 매체로서의 이미지의 가상성을 사유하게 한다. 아감벤(Giorgio Agamben)도 『목적 없는 수단』에서 재현을 둘러싼 감각을 되찾으라는 의미에서 ‘사유하라’고 말했다. 실제 세계와 재현된 이미지의 세계를 구분하고 이미지를 본래 이미지의 자리에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사람에게는 재현의 정치적 장치에 흡수되기 이전의 실재를 살 수 있는 역량이 있다. 그 역량으로 삶을 사는 것, 이것이 그가 제안한 ‘사유’이다. 몇 년 후 아감벤은 『세속화 예찬』에서 ‘세속화’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그런데 무슨 사용인가? 실을 감아 만든 공으로 고양이는 무슨 사용을 가능케 하는가? 그것은 어떤 주어진 영역 내부에서 하나의 행태를 유전적 등록(포식 활동, 사냥)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이 자유로운 행태는 그 행태를 속박한 활동의 형식을 여전히 재생산하고 모방하지만, 그 형식의 의미와 어떤 목적에 대한 일체의 의무적 관계를 텅 비게 만들면서 새로운 사용을 위해 그 형식을 열고 이용할 수 있게 만든다. 실타래를 가지고 노는 놀이는 쥐를 먹잇감이 되는 것에서부터 해방시키며, 쥐가 포획과 죽음으로 향해갈 수밖에 없음으로부터 포식 활동을 해방시킨다. 그렇지만 그 놀이는 사냥을 정의하던 바로 그 형태를 연출한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귀결되는 활동은 순수한 수단, 즉 하나의 수단으로서 그 본성을 확고하게 유지하면서도 목적에 대한 관계로부터 해방된 실천이 된다. 그것은 자신의 목적을 즐겁게 잊어버리며 이제 자신을 그 자체로서, 즉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 보여줄 수 있다. 새로운 사용의 창조는 오래된 사용을 비활성화함으로써만, 오래된 사용을 무위로 만듦으로써만 가능하다.”
종교의 ‘신성화’는 한 가지 사물에 한 가지 의미를 부여하여 법처럼 정해놓는 행위들을 대표한다. 세속화란 이렇게 한 가지 의미에 ‘바쳐진 것’을 해방시켜 자유로운 사용으로 돌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아감벤은 ‘세속화’를 설명하기 위해 실을 감아 만든 공으로 고양이가 포식 활동 흉내를 내며 노는 것을 예로 들었다. ‘놀이’의 형태로 자주 실현되는 ‘세속화’는 기존에 모든 사물을 재현한 이름으로부터 그 사물을 자유롭게 한다. 실재와 언어의 한 가지 결합 관계가 깨지고 새로운 재현이 이루어진다. 이때 새로운 재현은 권력 장치에 이용될 수 없는 나약한 재현이다.
아감벤이 말한 ‘세속화’는 언어와 이미지의 권력 장치에 잔고장을 내는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숲으로 들어간 아담에게 숲을 나오라고 말한다면 더 깊이 숨을 것이다. 우리는 이 숲에서 언어와 이미지라는 벽돌로 빈틈없이 건축된 성 안에 갇혀 더 이상 밖을 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벽돌 한 장을 깨는 것으로는 성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벽돌이 깨진 틈 사이로 희미하게 밖을, 실재의 세계를 볼 수는 있다.
많은 문자와 많은 목소리는 내가 지배를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포스트식민주의는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 식민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니, 동양에 속하는 나라 사람인 나는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억압을 받는다고 하니, 여성인 나는 억압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계급 사회에 대한 비판은 수입과 재산에 따라 계급적 차별이 있다고 하니 그 기준에서 열등한 나는 차별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내가 정말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을 해봐야겠다. 이런 건 어디서도 물어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기정 사실로 간주되고 있는 것을 물어보는 것은 실례이기 때문에... 시간을 너무 멀리 거슬러 올라가려면 내 기억력 자체를 의심해야 할 테니, 오늘 하루를 돌이켜봐야겠다. 나를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게 만든 ‘숨은 권력’의 흔적을 볼 수 있을까.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우산을 챙겼다. 우산 때문에 가방이 무거워져 불만스러웠다. 전철역에 들어서면서 교통카드로 쓰고 있는 은행 현금카드를 손에 꽉 쥐었다. 혹시나 사람 많은 전철역 어디에서 이 카드를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1초쯤 불안을 느꼈다. 은행 카드는 주인을 못 알아보니까. 그리고 전철을 기다리면서, 승강장에 설치된 여러 개의 텔레비전 모니터를 통해 매일 반복되는 광고를 봤다. ‘이제 교회도 광고를 내보내는구나’ 혼잣말을 했다. ‘간 때문이야~’라는 우루사맨의 노랫가락을 나도 모르게 따라 했다. 학교에서 사람들과 같은 책을 보며 책 속의 깨알같이 박힌 문자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해독을 해봤다. 책을 쓴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고 살아있다 해도 프랑스라는 먼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 우리의 이해를 도와주기가 좀 힘들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가 살았던 시대도 아니고 그보다 더 이전 시대에 대한 글을 써놓은 것이다. 나는 그걸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오후에 학교를 나오면서 구름 낀, 그러나 비는 뿌리지 않는 하늘을 보며 무거운 우산 괜히 하루 종일 들고 다닌 것이 억울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서 머릿속으로 이번 달 수입과 지출을 계산해 보았다. ‘어디서 갑자기 예상치 못했던 수입이 생겼으면...’ 집에 와서 9시 뉴스를 보는데 화면에 저축은행 부도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기예보. 기상 캐스터가 말한다. ‘추분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날을 뜻합니다. 내일은 추분입니다. 하지만 정확히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날은 사흘 후인 xx일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문자가 왔다. ‘언니, 우리 내일 몇 시에 봐요?’ 오전에 약속이 있었던 걸 깜박하다니. 책을 뒤적거리다 자려고 했는데 일찍 자기로 맘을 먹는다.
참고한 글
Agamben, Giorgio 씀. 김상운 옮김. 『목적 없는 수단 –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난장, 2009
Agamben, Giorgio 씀. 김상운 옮김. 『세속화 예찬 – 정치 미학을 위한 10개의 노트』 난장, 2010
Baudrillard, Jean 씀. 하태환 옮김. 『시뮬라시옹』 민음사, 2001
Said, Edward 씀. 박홍규 옮김.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1991
Buruma, Ian & Margalit, Avishai 씀. 송충기 옮김. 『’옥시덴탈리즘’ – 반서양주의의 기원을 찾아서』 민음사, 2004
Nancy, Jean-Luc 외 씀. 김예령 옮김. 『숭고에 대하여 – 경계의 미학, 미학의 경계』 문학과 지성사, 2005
Paul, Frédéric 씀. 송태미 옮김.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 파이널 판타지까지… 정흥섭의 작품 세계의 ‘축척’에 대한 연구』 (『오브제 트루베(Objet Trouvé)』 Gallery Mark, 2009 에 실린 글)
[1]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그의 저서 『시뮬라시옹』에서 이미지의 연속적인 단계를 설명했다. 실재를 반영하는 첫번째 이미지에서 출발해 점점 원상과의 관계로부터 멀어지다가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바로, ‘시뮬라크르’, 즉 어떠한 사실성과도 무관한, 원상과의 관계가 끊어진 이미지에까지 미친다.
[2] 낭시(Jean-Luc Nancy)와 아감벤(Giorgio Agamben)의 글을 읽다 보면, 글이 하나의 감각기관이 되어서 감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글을 통해 누군가의 생각을 읽는다기보다 글 자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글자를 해독하는 능력만을 사용해 글을 읽는 데 익숙한 독자는 새로운 능력을 사용해 글을 읽는 데서 신선함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