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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평론

작가평론_'그 파열의 순간을 기록하며' 글/유원준


디지털 스투디움의 미학 _ 그 파열의 순간을 기록하며 : 작가 정흥섭

 

 

앤디 워홀에 관한 모든 것을 알기를 원한다면, 바로 그림들과 영화들과 나의 표면을 봐라. 거기에 내가 있다.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 Andy Warhol

 

토마스 크로우(Thomas Crow) 워홀(Warhol) 전기 의자 이미지들로 구성된 작품을 마주하며 그를 사형 제도에 반대하는, 또한 미국적 상처에 주목하는 작가로서 분석하였다. 이러한 그의 분석은 당시의 아트, 그리고 워홀에 대한 일반적 분석대상을 상징화하는 과는 노선을 달리한다. 그러나 워홀은 위의 언급에 머무르지 않고, 다음과 같은 말을 잇는다.[1]

 

죽음 연작을 하는 데에 대한 심오한 이유란 없었으며, 그들이 시대의 희생자였던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을 하는 데에 대한 이유는 전혀 없었으며, 단지 표면적인 이유밖에는 없었다.” : Andy Warhol [2]

 

위와 같은 워홀의 언급은, 일견 당시의 이미지들에 대한 분석에 힘을 실어주는 하지만, 또한 굉장히 역설적으로도 들리기 때문에 어떠한 측면에서의 접근이 더욱 유용한가? 라는 질문을 무색하게 만든다. 다만 추측해 있는 것은 워홀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이미지가 지닌 외상적 실재를 이용하여 그것을 고정시키고, 가리고, 다시 그것을 생산하는 일련의 작업을 반복하며, 이미지에 의해 건드려진 주체의 지각과 의식 사이에서 파열을 발생시켰던 하다. 포스터는 이러한 그의 시도들을외상적 리얼리즘 특성으로 간주한다.[3]

 

글의 서두에서 워홀과 그의 작품 분석( 포스터 등의) 소개하는 이유는 오늘 만나볼 작가 정흥섭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논의의 전개를 발견할 있기 때문이다. 정흥섭 가상의 이미지들을 출력하여 현실에서 이어붙이기를 시도한다. 이러한 그의 작업의 과정은현실을 반영하는 가상적 이미지의 포착 -> 가상적 이미지의 출력 -> 현실을 구성하는 가상 이미지 구축이라는 도식에 따라 위와 같은 외상적 리얼리즘의 흔적을 드러내는 하다. , 그는 가상으로 점철된 현실의 이미지를 오리고 접고 붙여서 다시 그러한 가상을 재조합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의 실재적 현실을 직시하고 가상 자체를 현실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작업 과정은 실재 지시 대상이 예전 사진 이미지가 내포한 도상학적 주제 내지는 세상 속의 실재 사물과의 관계성이 모호한 지점에서 과거의 접근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분명, 디지털이 만들어낸 원본없는 이미지의 세계가 다른 포인트를 작가에게 제공한 셈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태생적으로 모호한 자기 지시성을 내포한다. 분명 현실에 기반을 개념으로부터 출발한 것임에는 분명한데, 복제와 조합을 반복하다보면 원래의 원본 개념과는 다른 별개의 개념이 담긴 이미지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이미지들도 어느덧 이러한 이중적인 차원의 전략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정흥섭 우리 주변의익숙하지만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주변의 이미지들을 포섭하여 자신이 그려내는 가상-실재의 모호한 경계선 위에 펼쳐내고 있는 것이다.[4] 이러한 지점에서 피에르 레비(Pierre levy) 가상과 실재에 관한 논의를 떠올려보자. 레비는 가상과 실재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닌 존재의 다른 방식이라고 언급하며,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존재의 단조로움 속에 의미를 부여한다.[5] 정흥섭 이미지 또한, 이러한 레비의 언급과 가상과 실재의 중첩된 부분을 제시함에 있어 연결되어 있다고 있다. , 그가 포착한 가상의 이미지들은 현실감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이 변환되어 실재 세계 속으로 투영되는 것이며, 그가 조합한 가상의 이미지들은 현실화된 가상성으로서 실체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작가 흥섭가상화자체가 현실을 창조하는 하나의 주요한 수단으로서 제시될 발생하는 이미지의 피상성에서 일종의 연민을 느끼는 하다. 그의 작업 <project 2006 ‘self-camera’> 살펴보자. 사이버 세상 속의 떠도는 이미지들은 현실에 바탕을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가상적이다. 작가는 지시적인 깊이의 부족과 주관적 내면성의 결여로 인해 발생한 이미지의 얕은 피상성들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보드리야르가 아트의 특성을 분석하며 대상이 지닌 의미로부터 시뮬라크라한 표면에로 이미지를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언급했다면, 정흥섭 그러한 이미지의 해방에 의해 소외된 현실과의 연계성과 자기지시성의 부재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러한 그의 전략은 얇은 종이로 출력물을 통해 가시화되며, 숨겨진 외상적 실재를 드러내기 위한 찢어 붙힌 이미지로서 표출된다. 이러한 그의 작업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을 살펴보자. 그가 포착한 이미지들은 우리의 환경 속으로 가상적 이미지의 침투가 얼마만큼 많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화면 속의 (현재까지의) 평면적 이미지들은 우리의 뇌를 세뇌시켜 차원의 벽을 넘어 인식되고는 있다지만, 여전히 그것들은 가볍고 허구적인 것들이라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다. 또한 그러한 이미지들의 이상향이 현실 세계에 근거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하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허구적 이미지들이 실재를 구성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무게감 없게 소모되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제 그의 작업 속에 감추어진 하나의 전략을 살펴보자. 정흥섭 디지털 매체의 미덕이라 있는 자기 복제성을 과거의 인쇄 매체 속에 담아 표현하고 있다. 무한히 반복될 있는 디지털 이미지의 가상 세계를 작가는 모더니즘 회화에서 사용되었던 일종의 토톨로지(동어반복) 구조로서 이해한다.[6] , 그에게 있어 가상과 실재는 하나의 진리에 대한 토톨로지적 구조를 드러내는 현상으로 존재하며, 전략적으로 인쇄 매체의 복제성을 빌어 표현한다. <FIFA 2005>, <윤두서> 등의 작품들에서 관찰되는 거칠게 조합된 인쇄 매체들의 얇은 표면성은 외상적 실재의 양상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지점은  라깡의투셰(tuche)’ 혹은바르트의 푼크툼(punctum)’으로 설명되는 주체의 지각과 의식 사이의 파열의 순간을 가시화한다.[7] 다만, 그의 작품에서의 보여지는 차별적 지점은 그러한 개념들이 주체 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객체로서의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또한 작품의 몸체를 구성하는 가상적 이미지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스스로의 의식 파열 순간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 있다. 꿈이 실재로 넘어오는 순간 소멸한다는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디지털 이미지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가상적 오브제들은 스스로의 이상향인 실재에 발을 딛는 순간, 스스로의 피상성에 의해 파열되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작가 정흥섭 디지털화 스투디움의 상태들을 깨트리는, 혹은 스스로 파열되는 그러한 순간들을 제시함으로서 자신도 모르게 설득되고 마는 우리의 가상적 현실을 반추한다. 그러나 디지털로 도배된 현실의 가상화는 과연 그렇게 파열될 밖에 없는 것일까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게된다.

 

 

. 유원준 (앨리스온 편집장)

 

 

 



[1] Thomas Crow, “Saturday disasters: Trace and Reference in Early Warhol,”, in Serge Guilbaut, ed., Reconstructing Modernism, Cambridge: MIT Press, 1990, 313,317

[2] Gretchen Berg, “Andy: My True Story,” Los Angeles Free Press, March 17, 1963, 3.

[3] Hal Poster, 이영욱·조주연·최연희, <실재의 귀환 The Return of the Real>,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3, 198~200p 참조.

[4] 작가 개인 블로그 http://heungsup.tistory.com/ 참조.

[5] Pierre Levy, 전재연 , <디지털 시대의 가상현실>, 궁리출판, 2002, 20~24p 참조.

[6]  Tautology (logic), a statement of propositional logic which holds for all truth values of its atomic propositions / Tautology (rhetoric), use of redundant language,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7] 롤랑바르트(Roland Barthes) 무수한 사진 속에 나타나는 여러가지 기호들에 의해 길들이기에 가까운평균감정 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설명하며, 이를 라틴어인스투디움(studium)’이라는 말로서 표현한다. 또한 이러한 스투디움을 깨뜨리기 위한 예리한 ()들로서푼크툼(punctum)’이란 단어를 제시한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을 참조하기 바람. Roland Barthes, 조광희·한정식 , <카메라 루시다>, 열화당, 1998, pp.34~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