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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평론

작가평론_제1회 기술미학포럼 발제문 -글/진중권


 

리얼리티, 버추얼리티, 액추얼리티 - 진중권




놀라운 것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사진에 대한 관념에 알게 모르게 극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1930년대에 발터 베냐민이 사진이라는 매체에 주목했을 때, 사진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영역 너머에 있는 진리를 보여주는 기술로 여겨졌었다. 영화의 몽타주 언어 역시 외과의사의 메스처럼 현실을 분석적으로 해부하는 날카로운 시각을 발달시켜주고, ‘지금, 여기’의 제약을 초월해 체험을 확장시켜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때 영화와 사진이라는 복제매체는 인간을 원본의 지각보다 더 현실에 가깝게 데려다 주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미디어 발전의 어느 시점에 이 매개된(mediated) 체험은 서서히 그 진정성을 의심받게 된다.


1950년대에 상업적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면서 세계의 체험은 방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인간의 세계 체험은 미디어에 매개된 것으로 변하여, 매개되지 않은 것은 아예 사회적으로 의미가 없는 사소한(trivial)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현실 자체가 미디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세계 속에서 귄터 안더스는 이 매개된 체험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사실’(fact)라 부르는 것의 어원은 ‘만들어진 것’(factum)이라는 라틴어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우리의 것은 이미 ‘팬텀과 매트릭스’의 세계이며, 그 안에서는 사실 자체가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 현실 자체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가상을 불신하는가?” 미디어 철학자 빌렘 플루서는 ‘디지털 가상’이라는 짧은 에세이에서 이렇게 묻는다. 이 물음에 대한 전형적 답변은 귄터 안더스의 비관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가상을 불신하는 이유는 물론 그것이 ‘존재론적으로 열등하며, 인식론적으로 거짓’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플루서는 가상의 불신자들을 향해 매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가상만 거짓말을 하는가?” 이로써 그는 가상을 설명하는 플라톤적 패러다임의 전복을 시도한다. 한 마디로, ‘주어진 것’(datum)이 이미 ‘만들어진 것’(factum)으로 대체된 세계에서는 가상의 지위도 과거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복제에서 합성의 리얼리즘으로


오늘날 현실 자체의 현실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기술 복제된 영상의 존재론적 지위다. 수공으로 제작된 회화와 달리, 사진은 그 놀라운 사실성 때문에 ‘현실’의 대명사로 여겨져 왔다. 사진의 공신력은 아마도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짧은 순간 동안에는 인간의 개입이 완벽히 배제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리얼리즘’은 현실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사진의 리얼리즘’(photorealism)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원본보다 복제를 더 신뢰한다. 가령 사건의 현장을 찍은 사진은, 그것을 직접 목격한 이의 증언보다 더 참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기계에는 의지가 없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모상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인간의 손(mani)을 배제한다는 이유에서 사진이라는 매체는 조작(manipulation)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사진은 이미 찍기 전에 연출을 할 수 있고, 찍은 후에는 수정을 할 수 있으며, 연출이나 수정 없이도 이미지의 의미를 얼마든지 탈(脫)맥락화 할 수 있다. 프레임은 추상이다. 그것은 시간적 연속에서 하나의 순간을, 공간적 연장에서 하나의 단면을 떼어낸 것이다. 게다가 디지털과 더불어 사진은 이미 지표성(indexicality)을 잃어 버렸다. 사진은 복제 이미지에서 생성, 혹은 합성 이미지로 존재론적 위상이 바뀌었다. 이에 따라 사진을 더 이상 현실의 증언으로 보는 것은 힘들어졌다.


귄터 안더스는 이미 TV 생중계와 더불어 복제 이미지에 인식론적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음을 지적한 바 있다. 원상(Bild)과 모상(Nachbild)사이에 존재하던 시간의 차이마저 사라지면, 모상은 대중의 의식 속에서 그대로 원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복제가 곧 현실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아예 지표성 자체가 없는 디지털 이미지의 경우, 거기에 현실과 일치하라는 인식론적 요구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가령 CG는 그 본성이 사진이 아니라 만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가상과 현실, 거짓과 진리를 구별하는 플라톤적 문제의식이 성립할 논리적 근거 자체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뉴미디어의 언어>에서 레프 마노비치는 디지털 이미지의 리얼리즘은 과거의 리얼리즘과 다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컴퓨터로 만들어진 합성 이미지는 우리 현실을 열등하게 재현한 것이 아니라 다른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사진으로 찍히는 순간 현재는 과거가 된다. 사진은 피사체를 과거로 보낸다. 아날로그 복제 이미지의 원천이 이렇게 과거(“우리 현실”)에 있다면, 디지털 합성 이미지의 원천은 미래(“다른 현실”)에 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열등한 재현이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미래의 사실적 재현이다. 여기서 이미지를 설명하는 철학적 준거는 플라톤에서 니체주의로 이행한다.





가상현실에서 현실가상으로


다시 플루서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현실은 과연 얼마나 현실적인 것일까?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위대한 철학자들은 ‘현실 자체가 가상’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플라톤은 우리가 감각으로 보는 현실이란 한갓 가상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정신의 눈으로 보아야 할 진정한 실재는 이데아 세계라고 보았다. 플라톤과 철학적 대척점에 서 있었던 데모크리투스 역시 우리가 감각으로 보는 현실은 한갓 가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진정한 실재는 원자들의 배열이었다. 서로 대립되는 철학의 두 가지 위대한 전통, 즉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표자가 모두 현실을 감각에 나타난 가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플루서는 가상과 현실의 질적 차이를 입자들이 분포하는 ‘밀도’의 양적 차이로 환원시킨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그 차이는 점점 좁아질 것이며, 언젠가 그 차이가 궁극적으로 극복되면 가상이 곧 현실이 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 예측한다. 그때가 되면 “가상은 현실만큼 실재적일 것이며, 현실은 가상만큼 유령스러워질 것이다.” 오늘날 테크놀로지는 존재의 생성단위와 기술적 조작단위가 일치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나노, 뉴런, 유전자, 픽셀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기술적 조작은 이미 있는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아직 없는 자연의 창조에 가까워진다. 복제는 원본이 되고, 가상은 현실이 된다. 가상은 더 이상 존재론적으로 열등하지 않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은 어느새 ‘현실가상’(real virtuality)이 되고 있다. 이는 가상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관념에 변화가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플라톤주의 관념 속에서 ‘virtuality’의 개념적 상관자는 ‘reality’로 상정된다. 거기서 가상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불충분한 대체물로서, 현실을 닮았으나 현실은 아니라는 이유에서 존재론적 의혹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세계 자체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존재하는 디지털 시대에 가상은 미리 존재하는 현실을 자신의 원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원천은 플루서가 말하는 “대안적 세계”, 다시 말하면 앞으로 도래할 미래에 있다.


디지털 이미지는 과거의 모상이 아니라 미래의 기획이다. 가상의 존재를 의심하는 플라톤주의는 여기서 가상의 생성을 긍정한 니체주의로 이행한다. 니체주의 관념은 virtuality을 아마도 그것의 어원인 ‘virtus’와 관련시켜 이해할 것이다. 이 라틴어 낱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arethe’는 어떤 존재가 자신의 잠재력을 남김없이 실현하며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킨다. 디지털 이미지는 그 어원에 맞게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열등하게 재현하는 ‘가상성’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으나 실현시켜야 할 ‘잠재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경우 ‘virtuality'의 개념적 상관자는 아마도 'actuality'가 될 것이다. 우리의 것은 이미 reality-virtuality-actuality가 어지럽게 뒤섞인 혼합현실이다.





미디어적 에포케


진기종의 작품은 언뜻 보기에는 귄터 안더스처럼 TV 영상의 가상성을 폭로하는 작업으로 보인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작업은 주제의 평범함 속에 갇혀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TV 속 가상에 대한 그의 태도는 복합적이다. 예를 들어 그는 황우석 연구의 진정성을 믿으며, 그의 사기극을 폭로한 미디어의 배후에 음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그는 미디어가 거짓말을 할 때는 그것을 믿고, 미디어가 참말을 할 때는 그것을 불신하는 역설을 보여준다. 그 밖에도 그는 달 착륙이 나사와 할리우드의 연출이었다는 음모론에 끌리고, 상황을 인위적으로 연출한 ‘사기멘타리’임을 알면서도 다큐멘터리 채널을 즐겨 본다.


‘온 에어’에 등장하는 것은 CNN, 알자지라, YTN이라는 보도 채널, 그리고 디스커버리, 내셔널지오그래픽, 히스토리채널과 같은 다큐멘터리 채널이다. 텔레비전 방송 중에서 보도와 다큐멘터리 채널은 일반적으로 허구가 아니라 사실을 전달하는 프로그램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미디어의 사실(fact)이 결국 만들어진 것(factum)에 불과하다는 귄터 안더스의 말처럼, 진기종의 방송에서 관객이 보는 ‘사실’은 글자 그대로 일부러 조잡하게 만든 미니어처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가는 결코 계몽적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오늘날 매체에 대한 대중의 태도는 이중적이어서, 그것의 허구성을 의식하는 가운데 거기에 몰입하려 하는 특성이 있다.


오늘날의 대중은 더 이상 ‘미디어에 몰입하는 것’과 ‘그것의 매개성을 의식하는 것’ 사이에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오늘날 ‘메이킹 오브’에 대한 취향은 미디어의 대상적 층위와 메타적 층위를 넘나드는 대중의 이 이중적 태도와 관련이 있다. 사실에 픽션을 섞은 팩션은 이미 대중의 취향이 되었다. 대중은 가상 앞에서 그것이 실재하는지, 아니면 허구적인지 굳이 가리려 하지 않는다. 이 존재론적 중립 속에서 대중은 때로는 허구를 실재로, 때로는 실재를 허구로 지각하면서 기꺼이 실재도 아니고 허구도 아닌 제3의 존재층에 머물러 있으려 한다. 진기종의 작업에서 우리는 이 미디어적 판단중지(epoche)의 태도를 본다.





가상의 업로딩


“사진에 찍히는 순간 현재는 과거가 된다.” 정흥섭은 사물과 이미지의 결별을 아쉬워한다. 그의 트롱프뢰유 작업에서 이미지는 사물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원상(Bild)과 모상(Nachbild)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서 원상과 모상은 일체가 되어 하나의 윤곽 안에 공존한다. 원본과 복제 사이에 존재하던 시간차가 극복될 때 가상은 곧 현실로 지각되는 경향이 있다. 사물에 덧붙여진 이미지는 그 사물을 시각적으로 반복함으로써 현실로 나타나는 가상, 다시 말하면 일종의 도플갱어와 같은 존재가 된다. 안더스는 TV 영상을 유령(Phantom)이라 불렀고, 플루서 역시 디지털 시대의 현실이 유령스러워질 것이라 예언했다.


‘트레인’에서 정흥섭은 매우 독특한 전략을 구사한다. 원래 시간적 차이가 없는 영상을 1초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보여줄 때,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의 공간이 탄생한다. 관객은 두 개의 영상이 끝날 때쯤에야 비로소 그것이 두 개의 다른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영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앞의 작업이 원상과 모상 사이의 시간차를 없애는 방식이었다면, ‘트레인’은 1초의 시간차를 둠으로써 하나의 영상을 각각 다른 장소를 보여주는 두 개의 영상으로 제시한다. 원래 존재하지 않는 이 1초의 시간차를 통해 원상은 유령이,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의 도플갱어가 된다.


진기종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피사체를 연출한다면, 디지털 이미지를 사용하는 정흥섭은 피사체의 존재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가 웹에서 발견한 이미지들은 컴퓨터 게임의 캐릭터처럼 아예 피사체가 없거나, 시뮬라크르의 자전 속에서 피사체와의 연관이 끊어진 것들이다. 일단 디지털로 변환되어 웹에 올라온 이상, 피사체를 가진 사진과 피사체가 없는 그래픽 사이의 차이는 인정되지 않는다. 권오상의 사진 조각이 모델을 직접 촬영한 사진들로 이루어진다면, 정흥섭의 재료는 순수한 시뮬라크르들이다. 확대에서 드러나는 부족한 해상도와 얼기설기 찢어 붙인 균열의 선을 허옇게 드러낸 채, 그는 이 시뮬라크르들을 현실에 등록시키려 한다.


실재는 얼마나 실재적이며, 가상은 얼마나 가상적인가? 각 시대는 제 나름대로 현실을 정의해 왔다. 고대인들에게 참된 실재는 이데아 세계에 있었고, 중세인들은 천상의 세계를 진정한 실재로 보았다. 근대인들에게 참된 실재가 의식의 아프리오리 한 형식으로 여겨졌다면, 데모크리투스의 후예인 현대의 과학자들은 실재를 아마도 ‘미립자들의 확률적 분포상태’로 규정할 것이다. 가상의 제작이 손에서 기계로, 기계에서 전자로, 그것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함에 따라 ‘현실’에 대한 예술가들의 느낌도 변해왔다. 현실과 가상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 두 세계의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하는 것은 미디어 예술의 근본문제로 남을 것이다.


                                                             
                                                                 진중권 / 문화 평론가, 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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