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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 평론

전시리뷰_아트인컬쳐_포커스<게리웹/정흥섭> 글/유진상

아트인컬쳐 june 2008   ..

게리웹 3.28 – 5.25 아틀리에에르메스  /  정흥섭 4.25 – 5.25 대안공간루프

 

정말 사실적인 것을 원하는가

/ 유진상

 

« 포스트 프로덕션 »에서 니콜라 부리요는 오늘날의 용법의 문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 ‘작품은 이전의 서사를 확장하고 재해석하는 다른 서사와도 같다. 하나의 전시는 다른 전시의 각본을 안에 담는다. 각각의 작품은 상이한 프로그램 안에 삽입될 있으며 다양한 시나리오를 위해 사용될 있다. 예술작품은 이상 최종점이 아니라 예술적 노력의 무한한 연쇄 안에 존재하는 어떤 순간에 불과하다. (...) 용법의 문화는 예술작품의 지위에 있어서의 심각한 변형을 내포한다. 예술가의 관점을 담는 수용체로서의 전통적 역할을 뛰어넘어 그것은 이제 능동적 매개체, 악보, 전개되는 시나리오, 다양한 수준의 자율성과 물질성을 지니는 구조로서 기능한다.’

용법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현재 루프에서 전시 중인 정흥섭이나 아틀리에에르메스에서 전시하고 있는 게리 웹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 아주 섬세하게 적용된다. 정흥섭은 비록 다른 작가의 작품을 끌어내지는 않지만 이미 문화적 산물로서 순환하고 있는 기성의 이미지들을 재차 사용하고 있으며, 개리 역시 미술사나 혹은 일상에서 발견되는 형태들을 자유롭게 차용하고 조합한다는 점에서 모두 포스트 프로덕션 범주에 들어갈 있다.

 

현실을 오가는 평행한 경로

먼저 정흥섭에 대해 말하자면, 그가 다루는 소재는 우리 주변에서 굴러다니는 가장 흔하디흔한 이미지들이다. 아무도 이미지들의 출처나 지위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것들은 잡지나 만화, 인터넷에 흘러넘치는 게임, 뉴스, 스포츠, 드라마, 오락물, 쇼핑몰 등에서 추출된, 레지스 드브레이(Régis Debray) 용어를 빌면, 아주 가볍고 사라질 비주얼들이다. 그것들은 극단적으로 얇게 우리의 현실에 잠시 머문다. 그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것들에는  서명(Signature)’ 부여되어 있지 않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처럼 이름 없는 타인의 저작들에 그것들과 평행한 현실을 덧입히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정흥섭 역시 그러한 평행성(Parallelism) 테마로 한다 

 

jung heung sup_정흥섭

 

예를 들어, 그는 위에서 언급한 비주얼들을 무작위로 골라 출력, 확대한 , 사물의 이미지에 해당하는 부분을 잘게 뜯어내어 사물의 입체로 재구성한다. 평면으로부터 추출된 입체는 그것의 3차원적 현실감으로 인해 그것의 출처인 이미지와 평행한 다른 세계를 강렬하게 암시한다. 눈앞의 입체는 이미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도 아닌, 일종의 중간적 현실이 된다. 심지어 격렬한 전투 장면을 담고 있는 RPG(역할연기게임) 축구 시합의 순간을 다룬 <FIFA2005>게임의 켑쳐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인쇄물과 조각, 그리고 극적 공간 사이에서 떠돌고 있는 장르적 유령처럼 보인다.


 

 

대상을 직접 촬영한 사진들로 입체를 만드는 권오상의 사진-조각 작품과 정흥섭의 작품이 다른 점은 전자가 사실적 재현으로 나아가는 해체적 기술(Deconstructive technique)처럼 인지되는 반면, 후자는 처음부터 재현의 사실성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 영역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에서 입체적인 사물의 현전성은 처음부터 우리가 경험적으로 일컫는 현실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작가는 쓰레기처럼 흘러다니는 이미지들을 일으켜 세우는 걸까 ? 의미 있는 것들에 사실성을 부여하는 대신 무의미해 보이는 것들이 떠도는 허구적 영역을 사실의 이름으로 보여주는 것일까 ? 굳이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이의 눈에는 작가가 전생에 죄가 많아 작품을 통해서라도 무의미한 윤회를 거듭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작품은 사실적 재현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작가의 설명처럼 다시 사물을 이미지와 현실의 접점으로 되돌리는 형이상학적 순환에 대한 것만도 아닌 듯하다. 작품은 용법(Use) 대한 것으로, 관객은 작품에서 허구적인 현실이 허구적인 이미지에서 보란 듯이 튀어나와 있는 관계 자체를 하나의 사실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현실에 대해 구비하고 있는 지식이 기술하지 않는 경험과 해석들을 생산한다. 유비적 현실혹은 평행적 현실 사실과 다르며, 관객의 선택 의해 사실보다 훨씬 사실적으로 경험된다. 예술작품의 감상에 있어서는 바로 부분을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절에서 스님이 던지는 화두가 허구가 아닌 사실을 가리키듯이 말씀이다.

다른 작품을 예로 들자면, 사물 위에 흰색으로 칠한 아주 사실적으로 원래의 이미지를 약간 작게  그려 넣은 사진으로 찍은 <No Title>연작이 있다. 입체작품들과 달리 작품은 평명인 사진으로 완결된다. 부엌이나 거실에서 흔히 보는 양념 , 잡지, 알람시계, 휴대폰 등은 사진 속에서 월래의 자신보다 약각 작은 이미지에 의해 중첩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중첩이 완벽해 보이려면 정확한 하나의 시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이 사진으로 완결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사진들 속의 중첩 엽시 부분적으로 드러난 현실의 평행성을 함축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입체가 아니라 예술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잠재적이고 평행한 현실인 것이다. 여기서 작품은 현실들을 오가는 운반체(Vehicle)혹은 경로(Passage) 이해된다.

 


 

특정매개체로서의 역할

게리 웹의 작품 세계에 대한 기술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는 바로 차용(Appropriation)’ 혹은 참조(Referencing)’. 여기에는 헨리 무어, 안토니 카로, 브랑쿠지, 알렌산더 칼더, 도날드 저드와 같은 모더니즘 전반에 걸친 조각가들이 모두 호출된다. 이렇듯 웹의 작품들 속에서 언뜻언뜻 엿보이는 수많은 미술사적 참조들은 한편으로 그를 모더니즘의 전통을 계승하는 적자(嫡子)처럼 보이게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선배작가들의 스타일을 언제든지 원하는 대로 조합하여 요리하는데 상용할 있는 소스(Source)들로 간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러한 참조나 차용은 미술사적 인용뿐 아니라 도시적 삶의 일상적 요소들-쇼핑몰, 식당, 자동차, 나이트클럽, 은행, 호텔 - 대해서도 수시로 이루어진다.

화장실의 문고리나 식당의 실내장식에서 보이는 형태들이 수시로 작품들에 인용되곤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려해야 것은 모더니즘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최초에 모더니스트들이 자신들을 매료시켰던 당대적 현실의 다양한 양상들을 바라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스스로의 당대적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일 것이다. 안토니 카로나 도날드 저드의 조각이 회화에서 금방 뛰어나온 듯하다 평가를 들을 만큼 색채와 구성에 있어 이전의 전통적 조각과의 차별적 요소들을 담고 있었다면, 웹의 작품은 거기에서 걸음 나아가 조각과 회화를 비롯한 제반 창작적 프로세스들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눈앞에 보이는 것이 조각이라는 사실을 겨우 알아챌 있을 만큼 전통적인 조각의 특성이 축소되는 대신 색채, 조합, 구성의 즉각적 순간들이 작품의 감상을 지배한다. 이러한 가벼움, 기민한, 표피성은 그것의 시각적 요소들을 둘러싼 참조들과 맞물리면서 특정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그의 조각에 대한 감상은 매우 감각적인 즐거움으로 귀결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조각의 전통적 문맥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시도로 읽힐 수도 있다. 예컨대, 그의 <Split>연작은 수많은 사각형의 작은 거울들을 각각 다른 방향을 향하도록 평면상에 배열한 작품이다. 이작품에서 무수한 반사와 반영을 일으키는 표면은 마치 해아릴 없는 픽셀 혹은 터치들의 집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표면의 기복들은 직접적으로 예민한 입체적 공간의 운동을 지시하고 있다. 그것은 회화처럼 보이지만 전형적인 조각의 언어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조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경험의 양상이다. 그것은 시각적 충족감을 불러일으킬 아니라 수많은 경로들이 교차하는 특정하고도 비범한 순간을 생산한다. 관객은 바로 그러한 순간의 생산에 개입하는 입장에 놓인다. 수용자의 관점을 대폭 강조하는 이런 태도로 인해 우리는 웹의 작품을 최종적 결과물이 아닌 매개체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 모두에게 있어 용법 궁극적 의의는 새로운 수용의 공간을 여는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이 놓여 있는 현실 대신 그것이 생산하는 현실, 각각의 예술작품이 지시하는 평행한 현실의 현전(Presence) 그것이다. 창작은 허구의 생산이지만 그것은 날카롭게 현실로부터 다른 현실을 도려낸다. 그리고 그것이 매번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예술작품들이 생산하는 현실들을 경이롭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유진상 미술평론가, 계원조형예술대학 시간예술과 교수, 아시아프(Asian Students and Young Artists Art Festival) 감독, 국제갤러리 사외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