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릭 폴 / Frédéric Paul
미술평론가, 예술사 박사, Frac Limousin 디렉터 역임 / 현 프랑스 현대 미술 센터 (Centre culturel de rencontre du Domaine de Kerguéhennec) 디렉터로 재직 중 / Douglas Huebler, William Wegman, Allen Ruppersberg, Claude Closky, Jonathan Monk, Richard Wright....외 다수 작가들에 관한 미술 평론집 저술.
World Trade Center에서 Final Fantasy까지...
정흥섭 작품세계의 ‘축척(확대 축소 비율)’에 대한 연구
1.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우리가이 세상을 파악하기에 세상은 너무도 넓고 복잡하다. 이렇게 넓고 복잡한 세상을 파악해 보려고 애쓸 때 흔히 사람들은 재현이라는 방법을 택한다. 재현만이 세상을 일정한 축척(확대 축소 비율)으로 제한시킬 수 있는 방법이며 이를 통해 우리의 지적 능력이 닿을 수 있는 지경 안에 세상을 축소시켜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현을 시도하면서도 역시 자주 한계에 부딪힌다. 재현을 시도하기 전에도 이미 세상은 극도로 세분화되어 있었고 오늘날에는 삶을 단순화시키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여러 가지 노력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더더욱 세분화의 정도가 심각해졌다. 이렇듯 우리가끊임없이 파악하려고 애쓰며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이해하기- 여기서 나는 벌써 같은 동작을 지칭하는 데에 두 가지 다른 동사 comprendre(이해하다) 와 saisir(파악하다) 를 사용하고 있다.- 위해서는 알맞은 축척을 찾아 세상을 일정한 지경 안에 제한시키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이 사전 준비가 없이 덤벼들기에는 창덕궁 뜰이나 에펠탑은 우리에게 너무거대하고, 감기 바이러스나 내 신발 속에 낀 돌 조각은 너무 미세하다. 하지만 확대든 축소든 어떤 줌(zoom)의 효과로는 낯선 것을 친근하게 또는 친근한 것을 낯설게 만들어 주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망원경도 현미경도 이 세상의 무엇 하나 단순화시켜 주기 못한다. 이러한 과학적 발명이 있기 전에도 우리는 이미 복잡함(multitude) 속에서 헤매었었고 발명 이후에는 더욱 극명하게 이 복잡함(multitude)의 실체가 얼마나 엄청난 규모인지를 깨닫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을 파악하려는 노력에 있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원하고 그러기 위한 어떤 발판을 원한다.앞으로 나간다는 것이 어쩌면 우리를 둘러싼, 또 우리를 초월해 있는 이 세상 속에서 단 두 발짝 정도 앞으로 내딛는 걸음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나는 지금 한 낡은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이 방 안에는 한 다림질 테이블이 놓여 있고 이 테이블 위에는 신기하게도 우산 a도 미싱도 아닌 또 다른 작은 크기의 다림질 테이블이 붙어 있다. 내 막내딸이 옷 수선을 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다림질 테이블과 미싱 사이에는 두 말이 필요 없는 연관성이있다. - 우산과는 그렇지 않다. 의복 재단사들이 주로 사용하는이 다림질 판을 우리는 “jeannettes” 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감침질 보조용 기계에 대한 명칭은 아주 최근에서야 붙여진 것으로, 내 딸에게는익숙한 용어지만, 그 전까지는 오랜 세월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다) 별 다른 명칭 없이 존재했었다. 1922년에 와서야 비로소 Larousse universel 백과 사전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으며 그 이후로 곳곳에서 그 명칭이 상용되기 시작했고 각종 출판물에도 나타났다. 제조 번호만 붙여져서 나왔던 이 작은 테이블에 이름이 생기면서 기계 제조업자들과 판매업자들에 의해 카탈로그에 상품명을 적을 수 있게 되었고 이로써 상품의 유통이 더 용이해 졌다. -1922년은 첫 서울 국립도서관 창립 주년이면서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멸종된 해이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이 해에 모네(Monet)가 오랑주리 (Orangerie) 미술관의“Nymphéas(수련)” 를 국가에 기부했고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살인마 중에 한 명인 Désiré Landru 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 1922년 이후부터 테이블의 효율성은 전과 같지만 단지 정식 명칭이 등록된 사실만으로 위상이 높아졌고 지칭이 간편해 짐으로 유통이 용이해 졌다. 제조 정보와 명칭은 상품 명세표의 가로 세로 상의 기표이다. 상점에서나 우리의 머리 속에서, 모든 사물은 적어도 하나의 이름이 붙여진 순간에서야 비로소 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단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했던 행위이다.
줌(zoom)의 효과를 이야기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다림질 테이블에 대해 즉흥적으로 몇 자 적어보았다. 이쯤에서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자. 다림질 테이블과 쟈네트(jeannettes)라 불리는 이 축소판 다림질 테이블...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동일한 기능적 토대 위에 크기의 변화만으로 그 효율성이 두 배로 증대 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눈치 채지 못 하는 사이에도 이 현실에서는 수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궁극적으로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지만 이해하려는 시도는 많다. 그리고 그 시도 중에는 한번의 시도로 그치기 보다는 우리가 모델로 삼아도 될 만큼 일관성을 보이는 것들도 있다. 내 말이 혹 이랬다저랬다 횡설 수설 하는 듯 보인다면 그것은 내가 혼란한 것이 아니라 혼란한 실재 세계 속에 내가 있고 그것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
정흥섭은 집에서 흔히 볼 수있는 잡동사니 가운데 몇몇 오브제(objets)를 낚시질 하듯 선택한다: 알람 시계, 여성 잡지, 콩 당근 통조림, 핸드폰, 맥주캔, 등산화... 이 오브제들은 일상속 자신들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그대로 놓여진 채로 사진 촬영되어 이미지화되었는데 각각의 오브제는 사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디테일하게 각기의 정체를 나타내고 있다. 대부분 두터운 흰색 윤곽선으로 둘러쌓인 오브제들은 강조된 가장자리에 의해 볼륨이 확대되어진 듯이 보이지만 사진 이미지 속에서 오브제들의 사이즈는 실재보다 축소되어있다. 이미지에 가까이 다가가 보면 교묘한 책략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진이미지로 옮겨지기 전, 각각의 물체는 동일한 공정을 거쳤다: 우선, 물체는 일괄적으로 전체가 흰색으로 칠해진다. 그리고 흰색으로 덮힌 물체의 표면 위에 실재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동일한 물체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이 때 나타나는 흰색 윤곽선의 두께는 잔류하는 볼륨을 보여준다. 2003년 “Doyou want to save it?” 에서 선보인 여섯 점 시리즈 중 “Biba’ 만이 이 공정에서 예외를 보인다.특징적인 윤곽선이 빠져 있어, 붓질 솜씨가 보이지 않았다면 필시 누구든지 크기만 다른 같은 여성 잡지가 두 권 겹쳐져 있는 것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오리지날 물체는 소재를 제공한 동시에 축소된 복사 이미지의 바탕 화면으로 사용되었다. ‘BIBA’ 월간 잡지는 실제로 가판대에서 본래 크기의 잡지와 작은 사이즈의 포켓용 잡지 두 종류가 같이 놓여 있으며 작은 것은 약간 더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 종이 재료지 절감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수 많은 잡지 중에 ‘BIBA’를 선택한 것과 이 사실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선택된 잡지의 표지위에 보이는 소제목은 신기하게도 잡지 위에 축소되어 그려져 사이즈와 유혹이라는 두 가지 주제에 대한 화두를 동시에 건네고 있다. (패션, 별자리운세, 독자 편지와 함께 여성 잡지의 기둥이 되는 주제들이다.): L'amour en grand b / 예술에 있어서 정신(esprit)을 생산하는 데에는 반드시 손의 숙련된 기술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정흥섭은 무슨 이유로 자기 자신을 정밀 기계로 사용해서 이렇게 잡지를 복제해 낸 걸까? 이미 잡지의 본래 사이즈와 포켓용 작은 사이즈 두 개가 별개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두 사이즈의 잡지를 겹쳐 놓기만 했어도 별 차이가 없었을 텐데 작가가 굳이 손으로 그 정교한 작업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그의 조작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다. – 수작업이 관건인 함정과 연출, 즉 다시 말해 손으로 ‘그의 함정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손이야말로 이 작품에서 개념을 끌고가는 역할을 맡고 있는 점을 생각할 때 나는 이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 생각한다.두번째 부수적인 이유로는, 손으로 작업을 완성시키는 방식을 통해 작가는 이 한 쌍의 잡지가 작가의 일련의 작품들과 같은 문맥 속에 들어 가게 한다.즉, 한 가지 사유로 묶인 집합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는 말이다. 같은 해에 작가가 완성한 또 다른 작품에서는 작가의 현실적인 회화 기법이 하이퍼리얼리즘적인 기법으로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소재인 동시에 도구로서 두꺼운 자료집이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프랑스 개정법 및 시민법과 군법’이다. 주로 경찰서나 공공 행정 기관에서 사용하는 자료로서 1889년에 Henri-Charles Lavauzelle(Limoges-Paris) 편집으로 출판된 간행물이다.
정흥섭 이전에도 이미지의 힘에 대해 다룬 작가들은 있었다. 하지만 간단하면서도 근본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정흥섭의 작업은 주목할 만하다. 이 주제와 씨름할때 그는 두말할 나위 없이 분명한 이미지와 오브제(objets)를 찾아내는 데에 탁월한 재주를 보인다. 오브제로서 손색이 없는 오브제와 이미지로서손색이 없는 이미지들을 신중하게 고른다. 오브제는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 환경에 속한 것들이며, 이미지는 비물질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말이란 언제든지 우리를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앞에서는 ‘환경’이라는 말을 쓰고 뒤에서는 ‘영역’이라는 말을 쓴 것은 왜일까? 마그리뜨 시대 이후로도 여전히 이미지는 재현되는 과정에서 품위가 손상된 오브제일 뿐인 걸까? 적어도 정흥섭에게는 그런 것같이 보인다. 그가 선택한 오브제는 일상적이고 흔한 동시에 흠이 없다. – 입체파 시대 화가들이라면 같은 오브제나 혹은 그에 상응하는 것들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 그리고 바로 그런 진부할 정도의 평범함 때문에 우리는 그의 오브제를 신뢰할 수 있다. 반면에 그가 사용하는 이미지들은 허구의 왕국에 속한 것들로, 대외 선전용 광고 이미지, 비디오 게임, 컴퓨터 프로그램 인터페이스의 세계에 속한 것들이다. 이 왕국은 가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전문 용어를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로는 모순적이게도 “증강 현실”(réalité augmentée)이라고도 불린다. – 초현실주의자들 조차도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서 감히 취할 수 없었을 법한 이미지들이다. 오브제는 조작되기 위해서 선택된다. 이미지는 우리를 조작하기 위해서 선택된다. 이 두 세계 사이에서는 갖가지 속임수가 가능하다. 정흥섭은 이런 방법으로 오브제를 이미지로 또 이미지를 오브제로 변환시킨다. 그러나, 많은 작가들이 한 사물을 다른 사물의 이미지로 재생산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이는 반면 정흥섭은 이 두 카테고리를 거침없이 갈라 놓고 있다. 그에게 환영의 문제는 아주 진지한 문제이며, 조작(속임수)은 늘 밝혀져야 한다. 이 원칙으로부터 그의 오브제는 완성된다: 한 오브제 위에 축소된 그 오브제의 이미지가 나타나고 그 속에서 우리는 작가의 손의 정교한 솜씨를 본다. 보는 즉시 파악할 수 있고 (볼륨감이 강한 “Nouveaux codes français” 는 예외다), 결국에는 오브제가 보여진다는 의미에서 최종적으로 작품은 사진 촬영을 통해 완성된다. 두 개의 재현 공정(회화와 사진)은 포개어 놓여져 오브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축소시켜 주고 있으며 작품을 더욱 매끄럽게 만들어 준다.
“발견된 오브제”(Objet Trouvé), 정흥섭이 올해의 개인전을 위해 전시 테마로서 붙인 제목이다. 잘 “발견된” 좋은 제목이다. 이 제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우리는 발견되는 오브제가 없을 시대를 곧 맞이하게 될 것이다. 공항에서 가방을 버려 둔 채 몇 분 간 자리를 비운 적이 있는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잘 안다. 가방을 되찾을 수 없었던 것은 가방이 분실물 관리소로 옮겨졌기 때문이 아니라 안전 요원들에 의해 완전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 이런 부주의함을 보인 사람은 즉시 테러의 요주 인물로 의심을 받는다. 공공 장소에 버려진 오브제는 이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폐기처분 되지 않고 남겨 지는 것들은 다 상품 정보가 부착된 레디메이드(ready-made)들뿐이다. – 또한 이제 우리는 손에 가방을 든 채로 박물관에 들어 갈 수 없고 “여행 가방속 상자” c (“boite-en-valise”)를 든 채 그 곳을 나올 수도 없다...
3.
정흥섭이 좋아하는 오브제(objets) 중 하나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 어딘가에서 이것을 잃어버렸을 때 되돌아가 찾아 보려하지 않는 하찮은 오브제, 하지만 없어지자마자 바로 새것으로 교체 되어야만 하는 오브제, 이 호환성 때문에 더욱 존재가 가벼운 오브제, 늘 어디서나 손쉽게 찾을 수 있는 물건이지만 결코 되찾아 지지는 않는 물건. 혹은 단정치 못한 한 고고학자가 운수 나쁜 날 잃어버렸다가 후에 우연히 발견했을만한 오브제, 하찮으면서도 꼭 필요한 오브제. 그게 바로 단추이다... 단추는 옷의 한 깃과 다른 깃을 여며서 닫힌 상태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액세서리다. 나는 앞에서 재단에 관련된 장황한 비유로서 이 글의 서론을 열었다. 여기서 다시 반복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두 번 이상 정흥섭은 그의 작업에서 의복 아이템에 대한 그의 관심을 나타냈다.
정흥섭의 가장 최근 작업은 2009년 “Digital fossil” 시리즈이다. 이 작업은 간단한 실험을 통해 3D 그래픽 프로그램 상 오브제들의 단층(지층)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작업을 묘사하는 데에는 지금 막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David Shrigley의 한 그림[i]이도움이 될 것 같다. 이 그림에는 한 남자의 나체가 나온다. 주름지고 벗겨진 이마에 평균 체격을 한 남자가 허공 속에 추락하면서 “나는 떨어진다/나는떨어진다/아! 안돼/나는 떨어진다(I’m falling/I’m falling/Oh no/I’m falling)”라고 외친다. Shrigley의 모든 작품에서 늘 그렇듯이 떨리는 선으로 그려진 뎃생이지만 그의 뎃생은 이 보편적인 처절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완벽한 구성을 보여 준다. 종이의 윗부분에는 추락하고 있는 남자의 몸짓이 나타나 있고 아랫 부분에는 자로 그은 듯한 선이 있는데 이보다 더 간결할 수 없을 만큼 깔끔한 수평선이그려져 있다. 그 선에는 들어 올려진 팔과 위의 남자와 흡사하게 생긴 남자의 얼굴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남자는 이렇게 외친다: “나는 물에빠져 들어간다/나는 물에 빠져 들어간다/아! 안돼/나는 물에 빠져 들어 간다(I’m drowning/I’m drowning/oh no/I’mdrowning)”. 두 불행한 남자는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있는 상황에 있고 어쩌면 쌍둥이일 수도 있다. 물에 빠진 남자가 허공에 내던져져 추락하고있는 남자에게 살려달라고 구호 요청을 하고 있고 내던져진 남자 역시 물에 빠진 남자에게 절망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여기서 Bruegel의작품 ‘장님의 우화’ d를 떠올려 보자. Shrigley의 그림 속에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두 남자는 곧 죽어가고는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고 있기 때문에 장님은 아니다. 하지만 두 남자 모두 큰 고통을 치러 가며 일정한 공간 속에 잠식되어 있는 상태라는 점에서 Bruegel의 “장님의 우화”를 연상케 한다. (Shrigley의 뎃생은 더 이상 문학적이지 않고 과학적이다. 이 마술에 의해 그의 그림은 표현주의를 떠나 미니멀 아트가 되었다.) 바로 이 일정 공간에 갇힌 상태가 Shrigley의 그림과 정흥섭의 “Digital fossil”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다. 디지털 화석은 소재인 동시에 가설로서 단추 하나를 취한다. A4용지 더미 속에 묻힌 가상의 단추는 네 가지 버전으로 보여진다: 첫번째 버전은 3ds 프로그램 속 오브제들의 랜더링 이미지를 프린트한 작품이다. 종이를 표현한 듯한 3차원 그래픽 오브제와 버튼 모양의 오브제가 겹쳐져 있다. 두 번째 버전은 “Digital fossil” 작업 제작중인 작업실을 촬영한 사진이다. 세 번째 버전은 영상 작업으로 단추의 단층 이미지들 모두를 A4 용지에 출력하여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 조형물을 영상 촬영한 애니메이션이다. (출력된 종이들은 책상 위에 차곡 차곡 쌓여 있는데 영상이 진행되면서 한 장 한 장 줄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순차적으로 보여지는 단추의 단면 이미지들에 의해 3차원 그래픽인 단추는 그 신비로운 분홍색 실체를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버전은 단층이미지들 중 몇 장을 출력한 작품인데 이들은 그래픽 프로그램 속에서의 오류, 버그(bugs)를 담고 있다. 3DS프로그램이 단추의 각 단면을 읽는 과정에서 희귀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종이 낱장들 위에 출력된 분홍색의 단추 단면 이미지들 중에 어떤 이미지에는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접붙이기 된 검은색 형체들이 있다. 이 검은 색 형체들의 예상치 못한 출현은 컴퓨터 프로그램에 이상이 있음을 알린다. 가상의 해결책들은 모든 것을 쉽고 간단하게 만들며 손 떨림 등과 같은 단점을 보완해 깨끗한 선과 면으로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변이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버그는 완벽한 설계로 지어진 건축물의 블랙홀이다.
단추라는 평범한 사물의 절단면의 모양이 추상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World trade center [ii]라는 공공건물의 절단면의 모양도 우리에게는 하나의 추상 드로잉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우연히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장 논리적인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정흥섭은 이 단면들을 새로운 시스템에 적용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아 냈는데, 이 새로운 시스템이란 추상적인 볼륨(objets), 즉 이미지로 구성된 추상적인 3차원 조형을 만들어 내는 프로덕션이다. 이 단순한 논리로 조합되어있는 이미지들 역시 발견된 오브제(objets trouves)의 범주에 들어간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세상은 이미 꽉꽉 차 버렸고 시간이 갈수록 ‘발견 되어지는 오브제’들은 없다. 근래에 들어와 그것도 아주 갑작스러워졌다. 이러한 결핍으로 인한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는 예상을 뛰어 넘어,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쯤에서 나는 정흥섭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David Shrigley의 뎃생과 함께 Virginia Woolf의 메시지를 인용하고자 한다: Woolf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작가가 노예가 아니라 자유를 가진 사람이었더라면, 써야 하는 것이 아닌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었더라면, 그의 글이 사회 관습을 토대로하지 않고 그의 고유한 감성을 토대로 쓰여질 수 있었더라면 흥미진진한 전개도, 코미디도 없었을 것이고 비극이나 사랑 이야기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단어들에 적합한 이야기를 도무지 찾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Bond Street의 재단사 [iii]가 재단할 때 쓸 만한 단추 하나 조차 없었을 지 모른다.”
정흥섭의 작업 중 단추의 첫등장은 2005년 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베스트셀러 비디오 게임의 제목이 작품 제목으로 붙여진 “Final fantasy” [iv]는 설치 작업 중 하나이다. 작가는 이런 종류의 새로운 설치 분야에 있어 과히 전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우리는 정흥섭이 어떤 방법으로 오브제를 이미지로 변환시키는지 보았다. 설치 작품에서 그는 방향 바꾸기를 시도한다. 즉, 이미지로부터 오브제 만들기. 우리가 ‘증강 현실’(가상현실)이라고도 부르는 그 의미에 따라, 그는 이미지를 오브제로 변환시킨다. 이 같은 원리로 2차원에서 3차원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진행된다. 그는 우선 이미지자료 하나를 선택한다. 그리고 이미지의 한 부분(사물이나 인물)을 골라낸다. 이를 그의 소재로 삼고 스캔한다. 이어서 스캔 받은 이미지를 엄청나게 큰 비율로 확대하는데, 이것은 마치 우리가 컴퓨터 화면상에서 세부적인 것들을 보기 위해 확대하는 경우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계속 확대하다 보면 어느 순간 픽셀에 묻혀서 결국 본래 형상으로부터 너무 멀어져 버리곤 한다. (이 픽셀들을 재현된 오브제의 원자들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대를 통해 정흥섭이 의도하는 것은 더 큰 이미지를 얻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크기의 재료를 준비하려는 것이다. 확대된 픽셀을 출력한다. 출력된 종이를 조각 조각 찢은 후, 찢긴 종이 조각들을 사용하여 처음에 선택한 이미지를 3차원 볼륨으로 만든다. Final fantasy의 경우 선택한 사물은 단추이고 단추는 젊은 여자의 솟아 오른 가슴부위에 잘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지 속에서 단추는 있으나 마나 한 오브제로서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긴 작업의 과정을 거쳐 100 x 100 x 20 cm 크기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조형 작품이 된다. 결국 본래 오브제로 ‘돌아온’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여행의 출발점이 된 바로 그 잡지는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에게는 조형물과 함께 작품의 중요한 열쇠이다. 잡지의 지면 상에는 사진의 제목인지 글의 제목인지 알 수는 없지만 콘텐트 소제목 쯤 되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있다: “값진 존재의 귀환?” 영국 문학을 왜곡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는 여기서 “Alice(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가가 가졌을 만한 생각에 대해 의문을 던질 수 있다. “Final Fantasy”는 대성공을 거둔 일본의 비디오 게임으로서 이 게임을 고안해 낸 일본 사업가들은 그 이전까지 파산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던 비디오 게임 사업이 앞으로 일본의 차세대 주요 산업이 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이 제목을 붙였다.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한 일본 영화 감독 야수지로 오수는 영화 개봉 2년 후인 1963년 세상을 떠났다. 신기하게도 프랑스에서 개봉됐을때 이 영화의 제목은 “마지막 환상(dernier caprice)” 이었다.
4.
자신의 물건을 슈퍼마켓 진열대 위에 다시 올려놓아 유통시키는 것처럼, 자신의 책을 도서관에 기부한다며 도서관 책장 위에 슬그머니 가져다 놓는 것처럼, 짚더미 속에 일부러 바늘을 되밀어 넣는 것처럼 e 정흥섭은 복제품의 대상으로 사용되는 오리지날을 다시 본래 그들의 환경에 되돌려 놓기도 하고 또 그 반대로도 한다.
프랑스어로 번역된 정흥섭의 글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그림을 볼 수 있다. 시적 순수함이 남긴 모든 것은 결코 본질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작가는 현대 디지털 시대를 이미지 홍수시대라고 선언하면서도 몇몇 이미지를 간직할 것을 제안한다. 또한 몇몇 이미지를 추가할 것을 제안하기까지 한다. 그의 의도는 언뜻 보기에 개념미술 선구자들의 의도에 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미지를 불신하면서도 “이미지의 현실성”에 신념을 가지고 있다. 말을 부적절하게 끌어다 쓰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단어의 뜻을 잠시 살펴 보자. 우리는 여기서 한 단어의 두 가지 의미가 서로 대립하는 것을 본다: 극단론적인 첫 번째 의미와 보다 피상적인 두 번째 의미를 가진 이 단어는 바로 ‘현실’이다. 현실은 실재의 본질을 지칭하는 동시에 그것의 재현을 뜻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실재는 우리의 이해 능력 밖에 있어서 우리는 실재를 이해할 수 없지만 실재는 우리를 가장 가까이서부터 가장 멀리까지 둘러 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실재를 빠져나갈 수도 없고 실재의 의미를 찾아내려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실재를 감지하는 것 자체가 이미 쉬운 일이 아니며, 게다가 실재를 알기 위해서는 그 뿌리를 인식하는데에 이르러야만 한다. 마치 뿌리는 실재의 한 부분이여서 우리에게 실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기라도 하는 듯 실재의 뿌리는 늘 집착의 대상이 된다.)
Virginia Woolf가 쓴 글 중에 이런 메시지가 있다. “정신은 끝없는 수의 진부한 느낌, 환상적인 느낌, 점점 사라지는 느낌, 또는 예리한 강철로 새겨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 느낌들은 도처에서 온다. – 끝이 없이 이어지는 무수한 원자의 비처럼; 원자가 빗방울로 떨어질 때 원자는 다시 태어나고 [...], 엑센트는 더 이상 같은 자리에 찍히지 않는다. 어제 중요했던 순간은 거기 그 순간에 자리잡지만 여기는 아니다 [...].[...] 떨어지는 그대로의 원자를 기록하자, 새기자, 보이는 그대로 불완전하고 단편적인 그대로, 기이한(앞뒤가 맞지 않는) 그대로, 모든 장관과 사건이 의식 속에 새겨둔 그림을 그려 보자. [iv]
이와 같이, 우리를 둘러 싼 장식과 우리가 입고 있는 옷, 우리가 사용하는 오브제, 그 밖에 아무 실용성이 없는 것들까지도 모두 자기자신의 이미지에 차곡 차곡 튼튼하게 쌓이고 있는 속성들이다. 우리가 입고 있는 셔츠 한 벌, 바지 한 벌, 잠바, 신발, 이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을 나타내 주는 것들이다.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오면 더 가관이다. 가구며 살림 도구들 모든 것이 손님에게 나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와 약속을 할 때 까페에서 보기로 하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휘감고 있는 이 오브제, 모두 우리가 다 선택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바랬던 것이 정확히 지금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을 예로 들면,이것은 실제로 내가 고른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상의가 필요했고 그래서 이것을 샀다. 만약 필요에 의해서 사지 않았다면 옷 자체를 보고 원하는것을 고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틀림없이 입을 때마다 나를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다던가, 그리고 알맞은 양의 단추를 매달고 있다던가 하는옷의 가치를 생각했을 것이고 마치 그 가치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듯이 더 큰 만족감을 가지고 입었을 것이다. 유용하지 않은 오브제는 원칙적으로 오브제 자체로서 선택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모든 경우에 필요와 욕구는 나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으론 필요에 의해 사용하는 오브제가 정리되어있고 다른 한편으론 욕구에 의해 소유되는 오브제가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이 혼잡하게 쌓이고 쌓여서 우리를 짓누르고 만다. 장롱은 집을 꽉 채우고 길은 도시를 가득 매우고 도시는 지평선을 채우고 만다. 그리고 먼지는 냉혹하게 퇴적되어 모든 것을 덮어 버린다. 왜 시원하게 뚫린 지평선이 그토록 최면적인 힘을 발휘하는지 아는가? 인간이 지평선을 봐야 하는 실제적인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지평선을 보고자하는 필요를 느끼는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를 뒤덮고 있는 것들로부터 헤어나오기 위해서이다. 비어있는 것(vide)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특히나 질식할 것 같은 상황을 빠져 나온 직후, 다음에 다가올 걱정을 느끼기 바로 전에라면 더욱 그렇다.
이미지가 불러 일으키는 환상속에 젖어 있을 때 우리는 그 오브제가 믿을 만 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전체가 사라졌을 때 부분은 자주 더 구체적이고 명확해진다. – 나날이 증가하는 개체들과 그 “복잡함(multitude)”, 그 개체들 하나 하나가 증가하고 또 그 하나 하나가 디지털화 되는 현상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주는 오늘날, 나는 소재인 동시에 도구로서 사용되는 정흥섭의 “오브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2009년 11월, 프레데릭 폴 (FrédéricPAUL)
번역_송태미
a. “재단용 테이블 위에놓인 우산과 미싱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다운 (beau comme la rencontre fortuite sur une table dedissection d’une machine à coudre et d’un parapluie)” : 프랑스 초현실주의 작가 이소도르 뒤까스 로트레아몽의작품 “chants de Maldoror”(1869)에 나오는 유명한 인용 문구.
b. Amour: 사랑,grand: 큰
c. 뒤샹(MarcelDuchamp)의 작품 “여행 가방 속 상자(la boite-en-valise)”
d. 피터 브뤼겔(PieterBrueghel) (1528 ~1569), “장님의 우화”(1568, 나폴리 미술관)
e. 프랑스 말에“짚더미 속에서 바늘을 찾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하기힘든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을 뜻한다.
[i] “Jan Mot” 월간지제 69호, 브뤼셀, 2009년 10월자페이지넘버 6.
[ii]“World Trade Center”, 2007,를제작하기전에정흥섭은 “On the water”, 2006, 작품에서한이름없는수중건축물을통해, 단면의모음이전체형태를재현하는그의아이디어를보여준바있다. 비디오애니메이션을통해확인되는이아이디어는정육면체의돌을쪼개어조형물을제작하는전통적인기법과맞닿는다. 참사로이어지는이쌍둥이빌딩의운명과관련해, 정흥섭은두개의종이블록을나란히설치하는쉬운방법을택하지않았다는점을주목하자. 이렇게제작된두개의빌딩은한블록안에자리잡고있다. 전통적인조각가들과비교할때, 정흥섭의선택은독창성을보인다.
[iii] Virginia Woolf, 소설의기술, “현대소설”, Rose Celli 번역, 파리, Seuil출판사 points 컬렉션, 2009년판, 페이지넘버 12.
[iv]위와 동일함, 페이지 넘버 12,13.